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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천님께 드리는 둘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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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4-06-13 17: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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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2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강우일 주교와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사목위원회 주교,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종북사제의 미사 집전은 성체모독?

 

수천님.

  첫 번째 편지를 드리고 나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과연 제가 수천님께 이런 편지를 드릴 입장인지, 그리고 그럴 자격이나 되는지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분명 그럴 입장도, 자격도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제 생활의 전부를 해외에서 하고 있고, 수천님과 달리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라고는 ‘의무’로 수행한 군 생활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연달아 편지를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밥’으로 연명(延命)하는 사람으로서, ‘교회적 신념’이 아닌 ‘사회 · 정치적 신념’으로 인한 ‘그리스도교 지체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든 제 의견을 수천님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수호’도 중요하지만, ‘교회 수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수천님께서도 이런 제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성사 거행의 장소에 대한 제 졸견(拙見)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사를 집전하는 이의 자격이 어떠해야 그 성사가 온당한 은총을 전달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수천님께서는 ‘현문권 신부님의 글에 대한 답장’에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33조 2항을 인용, “그리스도께서 미사 전례 안에 현존하시므로 이러한 미사는 교회의 어떤 행위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다”고 적고 계십니다. 이어 “위대한 교회학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미사의 은총에 대하여 이 세상의 선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크다”고 하셨지요?

  지극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미사의 중요성은 그 어떤 수식여구로도 설명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또한 “이처럼 거룩한 미사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거룩하지 않은 장소에서 드린다는 것이 과연 교회의 가르침에 맞”는지 현 신부님께 되물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천님께서는 이다지도 중요한 미사를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사제들이 집전하는 것에 꽤나 마음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제민일보>에 게재하신 ‘강우일 주교님께 올리는 건의문’에서는 강정 해군기지 미사에 대해 “성체모독”이라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그 미사는 성사적 효력도 물론 없겠군요. 과연 그럴까요?

  아주 해묵은 교리 하나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바로 ‘사효성’(事效性)입니다. 성사는 ‘성사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닌다는 말이지요. 사효성 교리는 256년 북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당시 교황 스테파누스 사이에서 촉발됐던 ‘세례논쟁’이 계기가 되었고, 이 논쟁에서 교회는 치프리아누스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성사론과 교회론에 반대하였습니다. 치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말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물론 교회 문헌에 박학하신 수천님께서 이 같은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세례논쟁에서 주된 다툼은 이단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가 그리스도교로 다시 돌아올 때, 그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단은 당시 교의논쟁의 결과로 교회로부터 배척된 이들, 당시 교회의 분파들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세례논쟁의 결과입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치프리아누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비록 이단으로부터 받은 세례라 할지라도 정당한 예식적인 절차와 성부, 성자, 성령 즉 성삼(聖三)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라면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바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비 가톨릭 교도들의 세례 규정이 그렇습니다.

  수천님, 이 논쟁이 있은 후 1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수천님께서 존경해 마지않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등장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역시 수천님께서 표현하신대로 “위대한 교회학자”답게 사효성에 대해서 기존의 교회와 같은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존의 교회 입장보다 더 강력하게 진화한 성사론으로 무장하신채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요한 복음 주석>에서 요한 복음 1장 33절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는 구절을 설명하시면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추후 교회가 성사의 사효성을 교리로 확정짓는 데 있어서 신학적 근거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세례도 그리스도가 주는 세례이며, 바오로가 주는 세례도 그리스도가 주는 세례입니다. 심지어 유다가 세례를 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가 주는 세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귀중한 말씀을 남기신 아우구스티누스께서 생전에 “공경해 마지않는 가톨릭 주교”라고 칭송하며 깊이 존경을 표했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밀레비스의 주교였던 옵타투스 성인이십니다. 더욱이 아우구스티누스께서는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석이 되는 자신만의 성사론과 교회론을 전개하시면서 그 신학적 근거를 옵타투스 성인의 신학에서 거의 그대로 빌려 오셨습니다.

  옵타투스 성인은 <도나투스 분파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성사의 유효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계십니다. 특히 세례를 베푼 사람이 교회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적법한 양식과 절차에 따라 베푼 성사는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인께서는 세례성사를 예로 드시는데,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의 경우 그 성사의 효력이 자신에 달려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씻어주시는 분은 성사를 집전한 사제가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치프리아누스, 도나투스파, 발두스파, 카타리파 등 성사의 효력을 성사 집전자의 성덕에 결부시키려는 이들에 맞서서 사효성을 더욱더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사효성은 피렌체 공의회를 거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재차 확인하였고, 이는 확고한 가톨릭 교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성사에 관한 한 “교회에서 행하는 대로 행한다는 지향”(Cum intentio faciendi quod facit Ecclesia)만으로도 성사는 그 자체로 효과를 지닌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여러 예들을 들어 수천님께서 지루하셨을지 모릅니다. 성사의 사효성에 대한 교회의 전통에 따른 결론은 하나입니다. 성사의 유효 여부와 은총은 성사를 베푼 집전자의 ‘의도’나 ‘성덕’과는 관계없이 성사를 받은 사람에게 정당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성사의 ‘원집전자’(minister principalis)는 그리스도이며, 집전 사제는 그야말로 ‘도구적 집전자’(minister instrumentalis)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수천님, 이쯤 되면 수천님께서 꽤나 큰 충격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천님의 입장에서 보면, 수천님께서 그리 존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교회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은 거의 수천님에 대한 배신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옵타투스 성인은 그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신학적 · 정신적 ‘숙주’(宿主) 노릇을 했던 것으로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수천님과 성사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을 ‘종북성인’으로, 옵타투스 성인을 ‘종북숙주’로 매도하지는 마십시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부(敎父)들을 ‘종북교부’로 치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사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천님께서 인용하시면서 강조하셨던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33조 2항의 규정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늘 미사 전례 안에 ‘친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누가 집전하고, 누가 참석하고, 어디에서 그 전례가 이루어지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삼(聖三)의 하느님께서 성사 안에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성사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북사제’든 ‘종박(從朴)사제’든 그의 ‘의도’나 ‘성향’과는 상관없이 그가 드리는 미사는 지극히 합당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수천님과 절친이신 ‘어버이연합’, ‘고엽제전우회’, ‘재향경우회’ 어르신들을 모시고 성당을 찾아가 미사 중에 강론하는 사제에게 삿대질하시고, 더불어 목소리를 높이시는 일이 더 이상 수천님의 당당한 과업이 될 수 없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또한 강정 해군기지 미사 역시 “성체모독”이 아님을 살짝 눈치 채셨을 테지요. 수천님께서 진정한 ‘천주교인’이라면 말입니다.

  수천님,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용서를 청합니다. 제 편지는 곧이어 드릴 세 번째 편지에서 “종북사제” 또는 “정치사제”에 대해 제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수천님과의 대화를 매조지으려 합니다. 그럼, 조만간 미사의 은총에 흠뻑 기대어 뵙겠습니다.

  두 번째 추신 : 지면(紙面)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반론을 제기하실 분은 편집국 이메일(editor@catholicnews.co.kr)로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원고분량은 200자 원고지 8매~15매 사이로 작성해 주십시오. 원고는 검토 후 게재하겠습니다.(편집자)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를 설립하여 도시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폭력에 맞서는 평화, 명사 아닌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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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4-06-13 17: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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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본당 사제의 직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본당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가끔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은 죄스러움입니다.
 

  6.10 항쟁을 맞이하면서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진압당하고, 밀양의 할배와 할매들 그리고 수녀들을 비롯해서 지킴이들이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의해서 무참히 무너지고 쓰러지는 현실을 접할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위안을 해보지만, 느껴지는 죄스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잔인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범죄자를 보면 분노합니다. 특히 패륜이라고 규정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 더욱 분노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금 밀양에서 일어나는 현실은 패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히죽 거리며 거리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하는 소위 경찰이라는 족속들은 범죄자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람이라고 여기는 유일한 대상은 청와대라는 아방궁에 자리 잡은 한 여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미친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쥐약을 먹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는 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찰들의 모습에서 쥐약 먹은 개가 떠오릅니다.

 

▲ 11일 오전 가톨릭 수도자들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 움막에서 행정대집행에 저항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밀양765㎸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람에 대한 신뢰는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공격의 대상이 너무 뚜렷하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들을 지우려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위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낍니다. 에카르트는 하느님의 이름을 “자비”라고 전합니다. 자비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비”가 무엇일까요? 자비가 용서일까요? 인내 혹은 사랑일까요?

 

  자비는 용서, 인내 그리고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는 정의와 평화이기도 합니다. 사다리 맨 위쪽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사람에게 빵을 떼어 던져주는 것,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라고 말만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내는 것, 무고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비라면 저는 이런 자비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라면 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을 교묘한 방법으로 희생으로 변질시키는 가르침을 저는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무조건적인 용서라고 그리고 그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을 저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개인적인 만족이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은 당신이 사셨던 사회를 향해 열려있었고 특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가르침의 우선적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이 감상적인 언어로 변했습니다. 감상적인 언어는 자기만족과 위안을 얻으려는 시도 속에서 잉태됩니다. 감상적인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랑, 희생, 믿음의 뜻을 자기만족을 위한 언어로 왜곡시켰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생이 신앙의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사랑은 애착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희생은 어리석음이며, 정의와 사랑이 사라진 믿음은 맹목입니다.

 

  현실 안에서 드러나는 표징을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면서 나는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인지……

 

  매튜 폭스는 정의와 평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앙공동체 속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언어가 빠진 상태에서 형성되는 영성은 거짓입니다.

 

  저는 자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가 지금 여기에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 감상적 형태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과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현실 안에 현존하는 어둠에 대해서 귀 막고 눈감은 채 언급되는 구원은 거짓가르침입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당신의 들어 높임을 통해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셨고, 그 시대의 어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둠의 확산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내셨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드러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심판과 단죄는 어둠이 드러나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어둠이 너무 크고 넓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십니까?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단죄나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드러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그들도 구원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발자국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제가 아는 이들 그리고 앞으로 관계 맺게 될 모든 이들에게 부여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비가 창조된 모든 생명들에게 구현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상호 일부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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