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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는 평화, 명사 아닌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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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본당 사제의 직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본당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가끔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은 죄스러움입니다.
 

  6.10 항쟁을 맞이하면서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진압당하고, 밀양의 할배와 할매들 그리고 수녀들을 비롯해서 지킴이들이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의해서 무참히 무너지고 쓰러지는 현실을 접할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위안을 해보지만, 느껴지는 죄스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잔인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범죄자를 보면 분노합니다. 특히 패륜이라고 규정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 더욱 분노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금 밀양에서 일어나는 현실은 패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히죽 거리며 거리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하는 소위 경찰이라는 족속들은 범죄자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람이라고 여기는 유일한 대상은 청와대라는 아방궁에 자리 잡은 한 여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미친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쥐약을 먹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는 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찰들의 모습에서 쥐약 먹은 개가 떠오릅니다.

 

▲ 11일 오전 가톨릭 수도자들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 움막에서 행정대집행에 저항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밀양765㎸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람에 대한 신뢰는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공격의 대상이 너무 뚜렷하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들을 지우려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위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낍니다. 에카르트는 하느님의 이름을 “자비”라고 전합니다. 자비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비”가 무엇일까요? 자비가 용서일까요? 인내 혹은 사랑일까요?

 

  자비는 용서, 인내 그리고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는 정의와 평화이기도 합니다. 사다리 맨 위쪽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사람에게 빵을 떼어 던져주는 것,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라고 말만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내는 것, 무고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비라면 저는 이런 자비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라면 저는 하느님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을 교묘한 방법으로 희생으로 변질시키는 가르침을 저는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랑을 무조건적인 용서라고 그리고 그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을 저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개인적인 만족이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은 당신이 사셨던 사회를 향해 열려있었고 특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가르침의 우선적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이 감상적인 언어로 변했습니다. 감상적인 언어는 자기만족과 위안을 얻으려는 시도 속에서 잉태됩니다. 감상적인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랑, 희생, 믿음의 뜻을 자기만족을 위한 언어로 왜곡시켰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사랑과 믿음 그리고 희생이 신앙의 언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사랑은 애착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희생은 어리석음이며, 정의와 사랑이 사라진 믿음은 맹목입니다.

 

  현실 안에서 드러나는 표징을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면서 나는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인지……

 

  매튜 폭스는 정의와 평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앙공동체 속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언어가 빠진 상태에서 형성되는 영성은 거짓입니다.

 

  저는 자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가 지금 여기에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 감상적 형태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과 믿음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현실 안에 현존하는 어둠에 대해서 귀 막고 눈감은 채 언급되는 구원은 거짓가르침입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당신의 들어 높임을 통해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셨고, 그 시대의 어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둠의 확산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내셨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드러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심판과 단죄는 어둠이 드러나는 순간 이루어집니다. 어둠이 너무 크고 넓습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십니까?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단죄나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드러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그들도 구원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발자국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저와 제가 아는 이들 그리고 앞으로 관계 맺게 될 모든 이들에게 부여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비가 창조된 모든 생명들에게 구현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상호 일부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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